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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의 산증인 송봉림 씨 인터뷰 “미군이 철저히 준비한, 질서 있는 철수였다”

영화 〈국제시장〉 열풍이다. 〈국제시장〉은 한국전쟁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근현대사를 덕수(황정민 분)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있다. 특히 흥남철수, 파독(派獨) 광부와 간호사, 월남전쟁까지 주요 사건들을 그려냈다. 그 덕분에 가난과 배고픔을 모르고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유용한 교육 자료이자, 가난 속에 고통받았던 이 시대의 기성세대들은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 속, 흥남철수의 산증인 송봉림씨를 만나기 위해 경기도 소재의 한 요양원을 찾았다. 그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둘 다 미국과 싱가포르에 거주하고 있어 몇 년 전부터 요양원에서 머문다고 했다.
그는 아직도 안경을 끼지 않고 신문을 읽을 정도다. 눈동자에서 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쏟아냈다.
인터뷰에 앞서 송씨는 이번 인터뷰를 결심하게 된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신이 겪은 이야기가 아직까지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죽기 전에 반드시 후세를 위해서라도 알려야겠다는 결심 때문이다. 그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과거 북에서 공산당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다고 했다. 국내에 자신과 같은 공산당 출신의 사람들이 있을 것임에도 이런 이야기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마도 용기 내어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월간조선》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수기 형식으로 실었다.

송봉림(宋鳳林)
⊙ 85세. 함경남도 흥남시 용성리 출생.
⊙ 흥남 제2중학교 졸업. 제5인민학교 교사.
⊙ 북한 민주주의청년동맹(민청) 선전부장, 1950년 12월 24일 흥남철수에 합류, 한국 육군 301 철도연대 보선반, 상이군인회 총무 역임.

글 | 김동연 월간조선 기자/ 자동차 칼럼니스트

흥남철수를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부두에 모여 있다.

나는 함경남도 흥남시 용성리에서 1930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 5남매 중 장남이다. 막내는 1950년 흥남철수 때 돌을 지난 갓난아기였다. 나는 흥남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큰 외삼촌, 작은 외삼촌, 고모, 고모부 등과 함께 살았다. 집사람도 북이 고향인데, 원래는 장진호 근처에서 살았었다.

1948년, 북한에서는 군 간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일성은 일선 학교를 통해 유망한 학생들이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이런 간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했다. 이를 토대로 북한해군사관학교 1기생부터, 38선 경비간부사관학교며, 이름은 다르지만 유사한 군 간부 육성학교들이 생겨났다.

나는 흥남에서 제2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중학교는 제1중학교부터 제5중학교까지 있었고, 남학생과 여학생이 구분되어 있었다. 나는 여러 차례 이런 간부학교에 학교장의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장남이었고, 아버지 연세가 많다 보니 군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학교에서 “내일 차가 오면 타고 가라”고 지시하면 “알겠다”고 대답만 할 뿐 실제 나가지는 않았다. 어떤 때는 설사병을 핑계 댔다. 당시 나와 함께 북한해군사관학교에 추천받았던 두 명 중 한 명은 떨어지고, 한 명은 붙었다고 들었다.

광복 직후, 북에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인재가 부족했다. 지식층이라는 사람들과 부유한 기업인들은 자유경제를 억압하는 공산주의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이남으로 내려갔다. 그 바람에 나는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언변이 뛰어나고 이해력이 좋다고 하여 1949년 9월 1일부터 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북한 민청의 선전부장이 되다

자신이 겪은 흥남철수 이야기를 들려준 송봉림씨.

북한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면서도 노동조합은 없고 직맹이라는 직업동맹이 있었다. 그리고 민청이라 부르는 민주주의청년동맹이 있었다. 지금은 사로청이라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는 직맹과 민청에 소속되어 있었다.

흥남시 교육청에서 선생을 대상으로 사전 집체교육을 약 한 달 동안 진행했다. 나는 독보회(讀報會)를 도맡아 발표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이게 발단이 되어 흥남시 교육청은 나를 민청에 추천했다. 나는 공산당원의 자격인 만 20세에 조금 못 미친 만 19세였다. 엄밀히 말해 1930년생인 나는 1950년 11월 26일을 지나야 만 20세였다. 그런데도 내가 공산주의를 열심히 위한다는 것을 인정해 선전부장을 시킨 것이다. 나는 그때 스탈린 전집 등을 밤새워 읽을 정도로 공산주의에 빠져 있었다.

선전부장의 업무는 일주일에 한 번씩 민청위원장의 강의를 듣고 학교로 돌아가 그 내용을 교직원에 전파하는 것이었다. 민청위원장실은 시청에 있었다. 내가 일하는 흥남 제5 인민학교에서 도보로 1시간 걸리는 거리다. 당시 민청위원장이 진행했던 강의의 제목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위대한 조국전쟁’이다.

내용은 소련의 전쟁사이다. 당시 소련에는 위성국들이 많았다. 그 위성국들이 독일에 점령을 당하고 소련은 레닌그라드까지 포위당했다. 그런 위성국들은 독일에 협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배고픔에 가죽신발을 삶아서 먹을 정도로 어려웠음에도 끝까지 투쟁했다. 그것이 바로 빨치산 전투역사이다. 그 강의에서 말하길, 독일군에 협조한 빨치산들은 다른 빨치산들이 데려가 인민재판을 통해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 그 내용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그 강의 내용을 모두 적었다.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집까지 걸어오면 밤 10시가 되었다. 배가 고파 해바라기씨를 5원 주고 사서 그걸 오는 길에 먹었다.

학교에서는 교감 주재로 매일 종회(終會)를 했다. 그때 내가 민청에서 배운 내용을 20분 동안 교직원들에게 강의했다. 이 ‘위대한 조국전쟁’의 정신과 빨치산 정신을 깊이 새긴 것이다. 교직원들은 다시 학생들에게 이 내용을 전파했다.

돌이켜보면 왜 북한이 그렇게 열렬히 위대한 조국전쟁을 가르쳤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김일성이 한국전을 일으키고 만약에 전쟁에서 북한이 후퇴할 때를 염두에 둔 것이다. 마지막까지 북한 사람들이 빨치산 정신으로 투쟁하라는 지시였던 셈이다. 김일성이 상당히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다는 것의 방증이다.

排共靑年團 적발

광복 후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지원 아래 공산화가 착착 진행됐다. 사진은 세계노동절 기념행사에 참석한 김일성(가운데)과 소련군 수뇌부.

흥남에는 배공청년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공산당을 청산하기 위해 모인 조직이다. 당수는 흥남공장 건설과 과장이었다. 사무장은 나의 큰 외삼촌이었다.

한국전에 임박해서 배공청년단은 위기에 처했다. 배공청년단의 젊은이 3명이 명주에 적은 배공청년단 명단을 자신들의 배에 묶어 이남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남한의 김창용 특무대장에게 그 명단을 보내려다 1950년 5월, 공산당에 적발되었다.

공산당은 명단에 오른 인물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나의 큰 외삼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은 외삼촌이 형의 시체를 찾겠다고 여기저기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이에 앞서 배공청년단은 1949년 8월, 한 사건을 모의했다. 소련 접경지역인 북쪽 지역에서 흥남을 거쳐 전방(남한과의 접경지역)으로 내려가는 선로가 있었는데 이 선로를 따라 화물열차가 쉴 새 없이 내려갔다. 군수물자들이었다.

그 화물열차들이 역에 서지도 않고 남쪽으로 끊임없이 내려갔다. 배공청년단의 젊은이들이 이 화물열차를 전복시키려고 모의를 한 것이다.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무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궁리한 끝에 대팻날을 모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대팻날은 다른 금속보다 강해, 기차 선로 틈에 꽂아두면 열차를 전복시킬 정도가 된다고 한다. 야간에 배공청년단의 젊은이들이 선로 사이 틈을 찾아 헤맸지만 날씨가 여름이다 보니 선로가 늘어나 대팻날을 꽂을 곳이 없었다. 기온이 올라가면 선로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그 작전은 결국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어쨌든 이런 사실로만 보아도 김일성은 전쟁 전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받은 여러 무기와 군수품을 미리 전방으로 옮겨두었던 것이다.

훗날 전쟁이 끝나고 1956~57년 무렵 남한에 배공청년단의 업적이 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 유가족을 위해 서울 상도동에 집을 100세대가량 지어주었다. 이곳이 바로 모자원이라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의 송호성 부대가 북침?

한국전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나는 학교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새벽 6시쯤 되니 한 선생님이 “큰일 났다!”며 자고 있던 나를 깨웠다. 라디오를 듣고서야 나는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인민군의 군가가 요란하게 흘러나왔다. 그러면서 “남한의 송호성 부대가 38선을 침범했고, 여기에 우리 인민군은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끝까지 밀고 올라왔다. 따라서 우리 인민군은 미명을 기해, 하는 수 없이 출동했다”라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남한의 북침이라는 이야기였다.

아침 8시쯤 되었을까. 라디오 방송에서 인민군이 개성을 해방시켰다고 했다. 북한은 어느 도시를 빼앗으면 점령이라고 하지 않고, 해방이라고 했다. 어려움에 처해 있던 사람들을 구해줬다는 의미이다. 학교에서 라디오 방송을 듣고 있다가 학교에 걸려 있는 조선반도 지도 인민군이 해방한 도시들에 깃발을 꽂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게 전라도 이리였다. 인민군이 전라도 이리를 해방시켰다면서 이리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라는 말이 라디오에서 나왔다. 내가 북한에 살면서 전라도 이리라는 지명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은 익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해 7월 중순 무렵, 내가 교사로 일하던 제5인민학교 교감이 서울 모 초등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교감 밑에는 교양주임(당 지도원)이라는 직책의 사람이 3명 있었는데, 이들은 선생님들의 수업태도를 순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 교 양주임들도 각각 남한의 교장으로 임명이 되어 남으로 내려갔다.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그 시절에 전쟁 시작 후, 불과 몇 주 만에 그렇게 빨리 인사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만약에 정말 북침을 당했다면, 그렇게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어찌 초등학교 교장 인사발령까지 낼 수 있었을까. 이런 인사명령은 흥남시 전역에서 있었다. 나랑 친하던 파출소장이며, 교직원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발령이 났다.

남한에서 치고 올라오자, 전라도로 발령받았던 교양주임은 돌아오지 못했고, 우리 학교감은 서울에서 흥남으로 돌아왔다. 그를 다시 만나 내가 남쪽은 어땠느냐고 물었다. 그는 “반동분자(남한 사람)들이 밤마다 여기서 꽝! 저기서 꽝! 하는 통에 무서워서 혼났다”고 말해주었다.

당시 김일성은 이승엽을 서울시장으로 임명하는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을 임명하여 남으로 보냈다. 이런 준비는 한두 달 해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자원입대를 유도한 김일성

6·25 당시 북한은 의용군이라는 이름 아래 청년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김일성의 지시 아래, 김일성대학에서 학생총회를 열었다. 골자는 이렇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은 위대한 조국전쟁(6·25 한국전쟁)이 발생했으니 펜 대신에 총을 들고 나가 싸우자!”라고 외치는 일종의 궐기대회(蹶起大會)였다. 말미에 그냥 가서 싸우는 것보다는 김일성대학 연대를 만들어 나가 싸우자고 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을 하겠다는 학생들이 군복을 입고 나왔다. 김일성은 연대장과 같은 주요 보직을 맡을 사람들을 이미 학생으로 위장시켜 두었던 것이다.

이 내용은 내가 교직에 있다 보니 잘 알고, 실제 그 김일성대학 연대에 있었던 이기삼으로부터도 들었다. 이기삼은 당시 형무소에 잡혀갔다가도 경찰간부의 도장을 위조해, 다시 나올 정도로 북한에서 유명한 위조범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말하길, 김일성대학 연대식에서 연대장을 하겠다고 나온 학생은 정말로 다른 학생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같이 학교에서 생활했으면서도 이들이 미리 준비된 군인이었다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그 정도로 김일성은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 김일성대학 연대라는 것은 하나의 대학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호소문’이라는 것을 북한의 모든 대학에 보냈다. 당시 북한에는 15개의 대학이 있었다. 그래서 다른 대학도 동참했다. 동참 대학에서는 ‘호응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그러면 전교생이 함께 군에 입대해 조국을 위해 싸우자고 외쳐댔다.

뿐만 아니다. 1950년 9월 15일은 김일성이 ‘국민총동원령’을 내린 날이다. 물론 그전부터 일반 회사나 관공서에 있는 남자들은 군대에서 오라고 하면 가야 했다. 교사를 하고 있는 남자들은 9월 15일까지 부르지 않았다. 그런데 9월 15일에는 선생들 중에도 걸을 수 있는 남자는 다 군에 가야 했다. 교직원 중 나를 포함한 17명의 남자 교사들이 신체검사를 통해 군에 가야 할 형국이었다. 말이 신체검사지 흥남시 의사들이 청진기만 대보고 합격시켜 모두 군으로 보낸 것이다.

그 의사 무리 가운데 제일 높은 직책의 의사가 마침 우리 학교에 있던 교의(校醫)였다. 그 의사는 평소 나랑 친하다 보니, 나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소?”라고 물었다. 나는 내 고환 중 한쪽이 축 늘어지는 걸 말했다. 그렇게 퇴산(疝)고환을 진단받고 보행을 할 수 없다고 해서 군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12월 24일 흥남철수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출했던 미 해병대는 혹한 속에서 중공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

흥남에서 살던 집은 당시 김일성 공대(흥남공대)에서 1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이 공대는 전쟁 중 시체보관소 및 병원의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장진호 전투에서 죽은 시체와 부상자들의 헬리콥터가 이 김일성 공대로 쉴 새 없이 들락날락거렸다. 내 집에서 이런 헬리콥터 행렬을 매일 볼 수 있었다. 그때가 1950년으로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집사람은 장진호 근처에 있다가 내 생사를 확인하려고 흥남으로 날 찾아왔다. 처갓집 가족들은 장진호 전투 때문에 다 죽었다.

흥남철수에 앞서 나의 가족은 회의를 했다. 전쟁 통에 모두 남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남을 사람을 정하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부모님은 남겠다고 했고 나와 동생들, 고모네 가족 등은 내려가기로 했다. 12월 23일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제일 큰 남동생은 열두 살이었고, 가장 어린 놈은 돌 지난 갓난아기였다. 나는 막둥이를 업고 흥남부두에서 가까운 고모네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24일 아침, 흥남부두로 고모네 가족과 함께 미군 배를 타려고 나섰다.

길 건너편에 보니 할머니와 아버지가 보였다. 부모님은 집에서 농사를 짓다 보니 소가 있었는데, 소도 끌고 나오셨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미군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등 떠밀리듯이 흥남부두로 나왔다는 것이다. 미군들은 카투사 군인들을 통해 마을 곳곳에 통보했다. “당장 집에서 나와 흥남부두로 가라! 지금 당장 집에서 나오지 않으면 불을 지를 것이다!” 결국 미군들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가 흥남철수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미군들은 피란민들이 가지고 나온 짐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배에 실었다. 겨울이다 보니 이불은 기본이었고, 기타 세간이 이것저것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가지고 나온 소도 배에 실었다. 소를 산 채로 싣기 어렵다 보니 부두에서 바로 잡아 각을 내서 가지고 탔다. 당시 피란민의 수가 9만8000명에 달했는데 그 사람들이 가지고 나온 짐도 모두 싣게 허용했으니, 그 무게와 양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혹자는 미군들이 피란민의 짐을 버리게 한 줄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힘이 더 있었으면, 우리 집 살림살이를 더 가져올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짐도 다 실었을 정도이기 때문에 흥남부두에 누구든지 코빼기를 보인 사람은 모두 데리고 나온 셈이다. 그 정도로 미군은 우리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배에 오를 때도 편했다. 영화처럼 피란민들이 밧줄이나 사다리 같은 걸 붙잡고 배에 올라탄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서두르는 사람 없이 걸어서 차분하게 올라탔다.

화물선을 개조해 몇 개 층으로 나눠

흥남철수 당시 1만4000여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미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구원한 배’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LST라는 화물선(Landing Ship Tank의 약자로 상륙용 화물선) 안에는 갑판면 외에는 천장이 없다. 배 안은 그냥 뻥 뚫린 운동장 같다. 그래야 높이가 높은 탱크나 군용물자를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갑판에서 보면 아래 바닥까지 몇십 미터는 족히 될 것이다.

이런 배에 사람을 태운다고 했을 때 아무리 많이 태워봐야 얼마나 될 것인가. 미군들은 이 점을 알고 배를 개조했다. 배에 원래는 없던 층을 만든 것이다. 층층이 사람들을 차곡차곡 태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이유다. 이걸 준비하는 데에도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인다. 층을 나누기 위해 거대한 철판을 용접해 붙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게 어디 하루 이틀 만에 할 수 있겠나. 전쟁 통에 인민군은 쳐내려 오지, 피란민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지, 그렇게 어려운 순간 그 배 안에 사람들을 태우겠다고 층을 나누는 작업을 해온 것이다. 미군의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없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군들은 사람들에게 먹일 물도 준비했다. 사람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물이 반드시 필요하다.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내려오는 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으니 끼니는 괜찮지만, 물은 있어야 한다. 미군은 이 물도 준비한 것이다. LST라는 화물선은 원래 취사 시설을 별도로 갖고 있지 않다. 피란민들 때문에 갑판 위에 대형 물탱크를 설치한 것이다.

화물선 안은 아까 말한 대로 몇 개의 층으로 나뉘어 사이사이 사다리로 이어져 있었다. 젊은 나는 호기심이 생겨 갑판 위가 궁금했다. 물도 받아 올 겸해서 갑판 위로 올라갔다. 흥남에서 해 질 녘이던 12월 24일 떠나, 다음날인 25일 아침 6시가 되니 거제도에 도착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바로 군함들의 요란한 함포 소리였다. 내가 흥남부두에 올 때부터 함포 소리는 끝이 없었다. 피란민을 태우는 화물선과 여객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군함들이었는데, 이런 군함들이 피란민을 옮기는 배 주변에서 적진을 향해 쉴 새 없이 함포를 발사했다. 언제부터 쏘아댔는지, 언제까지 쏘아댈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포격을 퍼부었다. 그때는 이유를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미군들이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철수시키기 위해 인민군을 향해 엄호사격을 한 것이다.

301 철도 연대 보선반 생활

거제도에 도착한 며칠 뒤인 12월 29일, 거제도 피란민 수용소에 철도원 모집 공고가 났다. 말이 좋아 철도원이지 철도 노무자였다. 피란민들은 먹고살 형편을 궁리해야 했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지원했다. 다들 육지로 가고 싶어 했다. 피란민 수용소에서 30리나 가야 하는 거제군청까지 걸어갔다. 나와 삼촌 그리고 사촌도 함께 갔다.

도착하고 보니, 지원자가 너무 많았다. 군청 관계자는 사람들에게 달리기를 시켰다. 20등까지 들어오면 합격. 나는 젊은 축에 들고 덩치도 큰 편이었다. 나는 1등이었는데 삼촌은 탈락했다. 1등이라고 소대장도 맡았다. 소대장 맡은 김에 나는 소대장 권한으로 삼촌과 사촌을 철도원으로 만들었다.

합격자들은 모두 부산으로 갔다. 거기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철도원이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군인이었다. 군인이라고 하면 지원자가 적을까 싶어 철도원이라고 말한 것 같았다.

북한 민청의 선전부장이 몇 달 만에 남한 군인이 된 것이다. 근무처는 301철도연대. 3700명으로 구성됐다.

그 즈음엔 낙동강 전선이 뚫리는 등 어려운 시기였다. 모든 군수물자는 트럭과 철도가 도맡았다. 전선이 뚫리니 철도 선로가 부서지고, 철교가 부서지는 일도 허다했다. 나처럼 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보선반이 되었다. 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기관사, 통신반 등에 합류했다.

나중에 열차를 타고 나흘이 걸려 충북 제천으로 보선반 임무를 하러 올라갔다. 화물칸 하나에 한 소대가 탔다. 가운데 난로가 있고 모포 하나씩을 덮고 잤다. 군대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군복은 후줄근한 국방색 천 쪼가리였고, 군화라고 해봐야 미군들이 신다 버린 것을 대충 신었다. 총도 일제시대 때 일본 사람들이 쓰던 장총이었다. 그런 총마저 모자라 80명 소대에 20정만 지급했다. 나중에서야 M1 소총을 모두에게 주었다.

밥도 주먹밥 세 덩어리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 그 밥을 아꼈다가 점심, 저녁까지 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침에 3개를 다 먹고 점심, 저녁은 굶었다. 소금물로 간을 했고, 별도의 반찬은 없었다.

보선반은 쉴 새 없이 바빴다. 인민군들이 수송로를 차단하려고 선로에 불을 지르고 철교를 부수기 일쑤였다. 그러면 보선반이 나가서 다시 선로를 깔아야 했다. 그때 선로는 대부분 나무로 만들다 보니 불에 타기 쉬웠다. 더군다나 선로에 까는 나무들은 기름을 먹은 나무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더 잘 탔다. 그렇게 나는 1950년 12월 31일 입대해서 1951년 9월 5일에 명예 제대했다. 그때는 몇 주간 복무하다 제대하는 경우도 있었고, 요즘처럼 정해진 복무기간이 없었다.

김영삼씨와의 인연

미군은 철수작전이 끝날 무렵 흥남항을 포격, 피란민을 구하기 위해 흥남항에 버려둔 군수물자들을 파괴했다.

내가 한때는 공산당원이었고,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나중에 남한에 와서야 깨달았다. 계기는 1952년 거제도 수용소에서 있은 3·1절 기념행사였다. 상이군인회 총무이자 사회자로서 연단에 올라 기념연설 중 일부를 했다. 그 자리에서 3·1운동은 매우 나쁜 운동임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북한에서 교사로 일했던 나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3·1절을 기념하지 않는다. 실패한 운동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권 때문이다. 이것은 각 나라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한 내용이다. 이것이 일제로부터 억압받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기폭제가 되어 3·1운동으로 번졌다 하나 김일성의 주장은 이들과 달랐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실제로 한국에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괜히 자결권 운운해서 우리나라 사람들만 죽었다라는 논리를 펼쳤다. 이 때문에 1946년 광복 이후 첫해는 북한도 3·1운동을 기념했지만, 그 뒤로는 기념하지 않았다. 이런 북한의 주장을 믿고 있던 내가 남한 거제도 3·1운동 기념식에서 이 말을 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냥 보아 넘겼는데, 행사를 보러온 특무대장이 행사가 끝난 뒤 나를 불렀다. “당신이 오늘 기념식에서 뭐라고 말한 줄 아시오?”라며 고압적으로 추궁했다. 나는 당당하게 “내가 뭐 틀린 말 했소?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라고 응수했다. 그는 “이보시오, 선생. 당신 말대로 3·1운동이 그렇게 나쁜 날이면 여기 남한에서 왜 기념식을 하겠소?”라고 되물었다. 그 뒤로 나는 그제야 공산주의 교육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거제도에 돌아와서 4년간 살았다. 돌아와서는 상이군인회 총무를 맡았다. 그 덕분에 어린 나이였지만 동네 유지들과 친분을 쌓았다. 거제도 경찰서장도 알고 지냈다. 그와 술도 먹고 친구처럼 지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유당 공천을 받고 3대 국회의원으로 나왔다. 피란민에게도 투표권이 있었다. 거제도에 10만이 모여 있으니, 국회의원 후보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곳이다. 김영삼 후보가 거제 경찰서장을 만나 도와달라고 왔다. 그 자리에서 거제서장은 나를 김영삼씨에게 소개했다. 평소 언변이 좋아 추천한 것이다. 그 인연으로 나는 자유당 연설회에서 사회를 봤고, 그 후 자유당 선전부장으로 일했다. 피란민들이 김영삼씨를 당선시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김영삼씨가 나를 취직시켜 주려고 한국전력 같은 곳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북에서 제2중학교를 나온 게 학력의 전부이다 보니, 항상 학벌이 문제였다. 그래서 좋은 곳에 취직하지 못하고, 그냥 자유당 선전부장으로 있었다.⊙

 

등록일 : 2015-02-14 오후 12:06:00   |  수정일 : 2016-05-2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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