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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는 북한이라는 곤란한 아이를 잉태한 부부와 같은 것 …” 한미일 동맹을 위한 숙원의 과제, 한일의 과거와 미래

한일관계는 북한이라는 곤란한 아이를 잉태한 부부와 같은 것 …
한미일 동맹을 위한 숙원의 과제, 한일의 과거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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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총리, 문재인 대통령, 펜스 부통령, 한미일 3국 정상이 2018평창동계올림픽에서 만났다. 사진=위키미디어

김동연 공개정보분석가

한일 과거사 문제는 지난 수세기간 지속되어온 풀리지 않는 이슈다. 때때로 양국의 관계는 돈독해지다가도 과거사 문제가 나오기만 하면 다시 틀어지기를 반복한다. 이런 관계에서 누가 잘못이고, 누가 문제인가? 그 잘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한일이 현재 처한 관계가 무엇인지부터 규명하는게 우선시되어야 한다. 현재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진전도 이룰수 없기때문에 현재상태 파악은 반드시 선결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숙제다.

필자는 이 한일관계의 현상태 파악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다각도로 고민했다. 어차피 역사적 논쟁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대립이다. 왜냐하면 양측이 기록한 역사에는 차이가 있고, 그런 역사에 기반한 양국의 국민들은 계속해서 상대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이룰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국 국민 전체인구와 일본 국민 전체인구가 마주앉아 토론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문제가 풀릴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그 토론이 수일이 걸릴지, 수년이 걸릴지 아니면 수백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결국 지금 한일의 상황의 출발은 역지사지에서 출발한다. 이 역지사지를 영어로 표현하면 “Put myself into your shoes” 다. 이 영문표현을 가져온 이유는 이 표현이 역지사지를 가장 잘 묘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방의 신발을 신어봐야 한다. 여기서 신발은 단순히 그 착용감을 말하는게 아니라, 당사자가 처해있던 상황에 내가 들어가봐야 한다는 말이다. 역지사지란 이런 것이다. 내가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봐야 아는 것이고, 상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일관계를 복잡한 학술적 혹은 정치적인 표현으로는 그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간단하지만 세계인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은유(metaphor)로 설명하고자 한다. 한국과 일본은 마치 부부(夫婦, husband and wife)와 같다. 한국이 아내이고, 일본이 남편이다. 여기서 왜 한국이 여자고 일본이 남자냐는 식의 비판 없이 봐주기 바란다.

가정의 아내와 남편이 함께 만나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출산이다. 부부가 부모가 되는 전환점이다. 부부가 부모가 되는 순간 이들의 어깨에는 인생의 책임감이 가중된다. 이 부부가 부모가 되는 과정에서 자식의 출산은 반드시 수반되는 상황이며, 두 부부 모두에게 중요하다. 특히 출산에 임하는 아내는 이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록이 된다. 인간은 극심한 고통속에서 여러가지 감정을 겪고, 그런 과정은 죽을때까지 잊혀지지 않는부분이다. 이는 출산을 하지 못하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이 군 시절 자신이 겪은 훈련기간의 고통은 평생 간직하는 스토리인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그런데 부인이 출산을 하는 순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는다. 이것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마찬가지다. 부부로 만나 자녀의 탄생은 결국 가족이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첫 아이 출산즈음이면 30대의 남편은 사회적으로 가장 바쁘게 일에 몰두하고 있을 시기다. 이런 와중에 어쩔 수 없는 업무로 아내의 첫 아이 출산 과정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또는 산부인과를 향해 가고 있었지만, 교통체증때문에 혹은 다른 사건 사고로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이런 사례들은 심심치 않게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가정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출산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남편은 평생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듣는다. 자신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시점에 배우자가 없었다는 소외감과 서운함은 뇌리에 트라우마처럼 간직된 탓이다. 이는 잊을수 없고, 지울수 없는 사건이다. 남편도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그러나 자신도 늦게 갈 수 밖에 없었던, 혹은 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다. 상사의 갑작스런 업무지시, 갑작스런 출장, 교통체증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이후로도 두 부부는 불화가 생길때면, 부인은 자신의 첫 아이 출산에 없었던 남편의 과거를 지적하고 잔소리를 한다. 남편은 그럴때면 “미안하다, 미안하다” 라며 달래보려 한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무력감을 느끼고, 당시 자신이 봉착했던 회사의 문제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인이 원망스럽다. 또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아내의 잔소리에 지치기도 한다.
지금 한일 관계는 이런 부부 관계와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고 있듯이 일종의 화해와 분노의 사이클이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마치 “Cycle of anger” 와도 유사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화가 풀리고 나면 피해자를 찾아가 사죄하고 화해한다. 그리고 관계가 회복된다. 그러다가 다시 어떤 부분에서 마찰이 생기면 다시 긴장관계가 발생하고 다시 화를 낸다. 그러면서 다시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뉜다. 그러면 화를 낸 가해자는 다시 사과하고, 관계가 회복된다 이런 과정이 무한하게 이어진다.
갈등의 폭발 -> 사과 및 화해 -> 관계 회복 -> 마찰 발생 -> 갈등의 폭발 -> 사과 및 화해 -> 관계 회복

여기서 말하는 화를 내는 대상은 일본이라고만 단정할 수만을 없고, 이슈나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분노의 사이클에서 가해자를 일본이나 한국이라고만 단정하지 말고 이해하기 바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선되지 않는 문제의 반복이다.

한일관계는 떼어내고 싶어도 뗄 수 없는 부부관계와 같다. 혹자는 ‘이혼하면 해결되는거 아닌가?’ 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물론 실제 부부관계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국가라서, 이혼후에도 그 곁을 맴돌 수 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지구상에서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그 위치를 바꿀 수 없다. 한일관계가 틀어진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일본이 하와이까지 이동할 수 없다. 한국이 하루 아침에 인도까지 떨어질 수 없다. 둘의 관계가 좋던 나쁘던 계속 함께 갈 수 밖에 없는 동반자이자 배우자인 것이다. 한일 관계는 부부의 사이가 틀어져도 각방을 쓸 수 없다는 말이다. 그 지정학적 위치때문에, 양측이 기분이 나쁘더라도, 한 이불을 덮고 자야하는, 또 함께 마주해야 하는 그런 존재다.

이 한일관계가 부부관계와 맥을 같이 하는 것에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다. 바로 북한이란 존재다. 부부사이가 틀어져도 부부가 참고 살아가는 동기이자, 삶의 원동력은 자식이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 부부는 종종 싸우지만 서로의 치부를 참아주고, 이해한다. 그리고 자식 앞에서만은 웃으며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한일에게는 이런 자식처럼 함께 신경을 써야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북한이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힘을 모아서 북한의 비핵화를 이뤄야 한다. 양국은 북한의 비핵화와 무력도발 억제라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 이러한 공통의 문제인식을 공유하는 마당에 과거사 문제는 큰 걸림돌이 될 수 없다. 걸림돌이 된다고 하더라도, 양국은 공동의 목표의식아래 통큰 이해심을 발휘해야 한다.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단점을 지적하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그 상대의 단점을 지적한다. 한국 속담에 가는말이 고와야 오는말이 곱다라는 표현이 있다. 내가 상대를 헐뜯으면, 상대도 나를 헐뜯는 악순환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지금까지 양국은 이런 치사하고 옹졸한 태도를 이어왔다.

양측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한번 통 크게 한번 접어주면, 반드시 상대도 그 진심을 느끼고 양보하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한일은 한쪽이 통 크게 양보를 하다 가도, 상대방이 그 통근 양보를 끝까지 비꼬자, 다시 태세를 돌변해왔다. “어, 내가 이만큼 양보했는데도, 너가 나를 무시해?”면서 다시 양보를 철회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뻔한 것인지도 모른다. 설령 상대방이 나의 진심어린 화해의 제스처를 몰라주더라도, 한번 더 양보하고, 또 한번 더 양보하고, 한번 더 양보한다면, 언젠가는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어찌보면 시간과 노력의 문제다. 부인의 잔소리를 웃으면서 이해하고, 받아주다 보면 부인이 설령 잔소리를 계속하고 있어도, 다음날 남편의 아침 밥상의 반찬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로 남편의 잔소리를 들어주고, 회사에서 겪은 고충을 함께 논의한다면 퇴근 후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이 빨라질 것이다. 양측이 누가 더 통큰 사람인지 보여주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런 양측의 통큰 이해는 단순히 한 국가의 수뇌부만 생각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런 통큰 이해의 출발은 국민 개개인에서 이룰 수 있다. 가령 큰 축구경기장에서 관람객들이 하나 둘 쓰레기를 줍기 시작하면 경기를 마친 뒤에도 경기장은 처음처럼 깨끗할 것이다. 모두가 통큰 이해에 동참하면 한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더 이상 어느 한쪽의 문제만이 아니다. 양국이 서로 악수를 하고 화합의 박수를 치려면, 내가 내민 손이 부끄럽지 않게 받아주는 상대의 손이 나와야 하고, 양손이 모두 맞닿어야 큰 박수소리를 낼 수 있다.

부부는 평생을 함께하는 동반자다. 죽어서도 다시 만나는게 부부다. 부부의 연을 괜히 백년가약(百年佳約)이라 하겠는가. 내가 지금 함께 사는 남편과 아내가 어찌 이 드넓은 우주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전쟁을 치루기도 했지만, 많은 역사적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런 전통적, 문화적 유사성은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살다보면 부부가 싸울수도 있다. 그러나 자식을 버리면서까지 이혼할 수 없다면, 함께 행복하게 뭉치는 방법을 모색하는게 현명한 해결책일 것이다. 한일이라는 부부가 함께 뭉칠 때, 실로 한미일 동맹이라는 큰 결실을 이룰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지역별 연대가 구축되지 않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가령 EU, NAFTA, SEATO, ANZUS 등이다. 동북아에서 한국과 일본은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이지 않는 유일한 국가들이다. 이제는 서로 뭉쳐야 할 때가 왔다. 특히 북한의 비핵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엄숙한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조속히 한일관계가 뭉쳐져야만 미국도 동북아 중심적 인도-태평양 전략을 공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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